다들 열심히 하는데 나만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깃을 뒤져봤다
“나만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며칠 전, 팀에서 서로에게 감사한 일을 적는 세션 로그를 읽다가 이 문장이 입 밖으로 나왔다. 페이지에는 감사가 넘쳤다. 누구는 매일 모두의 질문을 받아주고, 누구는 출장에서 큰 딜을 성사시키고, 누구는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다줬다. 다들 뭔가를 하고 있었고, 다들 여유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여유가 없다. 머리는 항상 복잡하고, 시간은 늘 모자라다. 그런데도 “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 게 없으면 시간이 남아야 하는데, 나는 한 것도 없고 시간도 없다. 심지어 작년의 나보다도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 모순이 그날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느낌 말고 데이터를 보기로 했다
기분으로 앓는 건 그만하고 싶어서, 깃을 뒤졌다. 최근 30일간 회사 레포의 커밋 로그를 사람별로 집계했다.
결과는 내 느낌과 달랐다.
- 최근 30일 내 커밋은 799개(머지 커밋 제외)였다. 하루 평균 26개, 팀에서 가장 많은 축이었다.
- 밤 11시 이후 커밋도 적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여유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그 동료의 30일 커밋도 700개대였다.
- 그 동료는 주말에도 회사 레포에 커밋하고 있었다. 나는 주말 회사 커밋이 0이었다 — 대신 그 시간에 개인 블로그 글과 사이드 프로젝트가 나왔다.
정리하면 이렇다.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부러워한 동료의 여유는 남는 시간이 아니라, 같은 부하를 지면서도 침착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리고 “하는 게 없다”던 나는, 실측 기준으로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작년의 나와도 비교해봤다
“작년에 비해 하는 게 없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으니, 그것도 숫자로 확인했다. 이번엔 한 구간만 자르지 않고 지난 1년을 월별로 펼쳐봤다.
월별 커밋 수 (머지 제외)
2025-07 174 ████
2025-08 334 ███████
2025-09 421 ████████
2025-10 430 █████████
2025-11 488 ██████████
2025-12 490 ██████████
2026-01 769 ███████████████
2026-02 245 █████
2026-03 633 █████████████
2026-04 739 ███████████████
2026-05 841 █████████████████
2026-06 754 ███████████████
2026-07 750 ███████████████
작년 7월 174개에서 올해 700~800개대까지, 꺾이는 달도 있었지만 추세선은 분명한 우상향이었다. 1년 전 같은 30일 구간과 직접 비교하면 110개 → 799개, 7배다.
양보다 더 놀란 건 범위였다. 언제 어떤 영역에 처음 커밋했는지를 뽑아보니, 지난 1년은 층을 하나씩 내려간 시간이었다.
난이도의 층계 — 각 층에 처음 발 디딘 시점
2025-07 ┌─ 화면 (FE + BE API 연동)
│ "조사(을/를) 표기 수정" · "리렌더링 문제 개선"
│ 틀리면: 화면이 어색하다 → 고치면 끝
▼
2025-12 ┌─ 계약 (게이트웨이 Go · proto 스키마)
│ "API 계약 필드 추가" · "BFF 배선"
│ 틀리면: 서버끼리 말이 안 통한다 → 양쪽을 다 고쳐야 한다
▼
2026-05 ┌─ 뼈대 (채팅 엔진 · DB 마이그레이션)
│ "타임아웃 체인 재설계" · "신뢰 경계 이전" · "마이그레이션 순서 충돌 해소"
│ 틀리면: 운영 DB와 프로덕션이 다친다 → 되돌리기 어렵다
같은 “커밋 1개”라도 층이 다르면 무게가 다르다. 표로 정리하면 이렇다.
| 1년 전의 커밋 | 지금의 커밋 | |
|---|---|---|
| 대표 제목 | “조사(을/를) 표기 수정” | “LLM 타임아웃 체인 재설계 — 폴백 전용 예산 확보” |
| 문제의 성격 | 정답이 있다 — 찾으면 끝 | 정답이 없다 — 트레이드오프를 결정해야 한다 |
| 틀렸을 때 | 화면이 어색하다 | 채팅이 끊기고, 폴백이 무너진다 |
| 영향 범위 | 컴포넌트 하나 | FE·BE·SDK 여러 층이 함께 움직인다 |
| 되돌리기 |
git revert 한 번 |
스키마·계약은 사실상 불가 |
이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스키마·계약 커밋)이 작년엔 0개, 최근 3개월에만 93개다.
층계를 다시 보면, 올라간 건 일의 양이 아니라 문제의 종류였다. 정해진 답을 찾는 사람(1층) → 남들이 지킬 약속을 정하는 사람(2층) → 정답 없는 트레이드오프를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3층). 그리고 이게 머리가 복잡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1층 문제는 풀면 머리에서 나가는데, 3층 문제는 결정한 뒤에도 “그 결정이 맞았나”를 계속 들고 다니게 된다.
재미있는 건, 커밋당 파일 수나 여러 서브시스템을 동시에 건드린 커밋 비율 같은 “정량 지표”로는 이 차이가 거의 안 보였다는 거다. 레이어별로 커밋을 쪼개는 습관 때문에, 다섯 계층을 관통하는 기능도 커밋 하나하나는 얌전해 보인다. 난이도는 커밋의 개수가 아니라 제목에 있었다. 측정하기 쉬운 지표일수록 이런 종류의 성장을 놓친다 — 이 글 전체의 주제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작년보다 못하다”고 느꼈을까. 곱씹어보니 작년에는 매주 “처음”이 있었다. 첫 배포, 첫 장애 대응, 처음 만져보는 스택. 뇌는 새로움을 성취로 등록한다. 지금은 더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하는데, 그게 일상이 됐다. 새로움은 느껴지고, 어려움은 안 느껴진다. 성장할수록 성장이 안 느껴지는 구조였던 거다.
그럼 왜 못 느낄까
데이터가 이렇게까지 반대라면, 문제는 일의 양이 아니라 느끼는 구조에 있다. 세 가지가 보였다.
1. 내 일의 산출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요즘 스키마 설계, 타임아웃 체인 재설계, 신뢰 경계 정리 같은 일을 한다. 이런 일은 잘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키마를 처음부터 맞게 설계하면 산출물은 “6개월 뒤에 안 터진 마이그레이션”이고, 타임아웃을 제대로 설계하면 산출물은 “안 끊긴 채팅”이다.
잘한 만큼 정확히 그만큼 안 보인다. 고장 난 걸 고치는 일은 전후가 선명한데, 사고를 예방하는 일에는 목격자가 없다. 그걸 막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보통 막은 본인뿐이고, 본인조차 며칠 지나면 잊는다.
작년의 프론트엔드 작업은 반대였다. 만들면 화면에 보였다. 누구에게든 “이거 내가 만들었어”라고 보여줄 수 있었다. 올해의 작업은 잘 될수록 보여줄 화면이 없다.
2. 완료 루프가 긴 일은 “끝냈다”가 드물게 온다
질문을 받고 답하는 일, 버그를 잡는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 루프가 닫힌다. “끝냈다”는 신호가 자주 오고, 그때마다 성취감이 조금씩 적립된다.
반면 설계가 들어가는 일은 몇 주짜리 루프가 열린 채로 유지된다. 열린 결정들을 머릿속에 계속 들고 다녀야 하니 머리는 복잡한데, 완료 신호는 몇 주에 한 번 온다. 많이 하고 있는데 끝낸 게 없는 느낌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루프가 길어서 생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나쁜 습관을 하나 얹고 있었다. 여유가 생기면 그 즉시 다음 과제를 채워 넣는 습관. 뭘 끝내도 음미할 틈 없이 바로 다음 게 들어온다. 완료 신호가 안 그래도 드문 일을 하면서, 드물게 온 신호마저 스킵하고 있었던 거다.
3. 남의 겉면과 내 작업대를 비교하고 있었다
감사 세션 로그에서 언급 횟수가 측정하는 건 업무량이 아니라 접점의 개수다. 매일 모두의 질문을 받는 사람, 모두가 체감하는 일(항공권, 회의실, 우산)을 하는 사람은 접점이 많고, 접점마다 감사가 쌓인다.
깊은 곳의 디테일을 잡는 일은 접점이 적다. 아무도 매일 찾아와서 고맙다고 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 로그에 나도 있었다 — 누군가 “디테일을 다잡아줘서 곧 새 기능들이 열릴 것 같다”고 적어줬다. 몇 달치 작업이 한 줄로 압축돼 있었다. 남들 항목은 사건 하나당 한 줄인데, 내 항목은 몇 달이 한 줄이었다. 적게 언급된 게 아니라, 압축률이 달랐던 거다.
처방
원인이 구조라면 처방도 구조여야 한다. 두 방향으로 정리했다.
남이 느끼게 하는 것 — 번역하기. 보이지 않는 일은 번역해줬을 때만 보인다. 얼마 전 내가 만들고 있는 시스템의 설명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바로 왔다. 자랑이 아니라 번역이다. “이런 문제가 있었고, 이렇게 될 뻔했고, 그래서 이렇게 설계했다”를 가끔 꺼내 보여주는 것. 정책 문서를 남기는 것도 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느끼게 하는 것 — 실측 회고. 느낌은 못 믿어도 데이터는 매주 온다. 이번에 깃을 뒤져서 확인한 것처럼, “이번 주에 닫은 루프”를 주기적으로 실측으로 확인하는 장치를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뭔가 끝냈을 때 바로 다음 일을 채우지 않고, 끝냈다는 사실을 등록할 틈을 주는 것.
마무리
“나만 하는 게 없다”는 느낌도, “작년보다 못하다”는 느낌도 데이터로 반박됐다. 하지만 느낌이 데이터에 진 게 아니다. 그 느낌은 내 일의 모양 — 긴 루프, 보이지 않는 산출물, 적은 접점, 일상이 된 어려움 — 이 만들어낸 정직한 신호였고, 다만 가리키는 방향이 틀렸을 뿐이다. “내가 부족하다”가 아니라 “내 일은 원래 안 보이는 종류로 바뀌었다”가 맞는 해석이었다.
혹시 비슷한 느낌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으로 결론 내리기 전에 한 번쯤 자기 로그를 뒤져보길 권한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작년의 자신과 비교해보길. 생각보다 많이 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생각보다 멀리 와 있을 확률은 더 높다.
이 글도 그걸 확인한 기록이다.